
미국 금융시장의 핵심 인프라가 블록체인으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열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미국 예탁결제기관 DTCC 산하 예탁기관 DTC에 ‘무조치(No-Action) 서한’을 발급하며 주식과 채권, 국채 등 주요 금융자산을 온체인에서 토큰화해 보관·결제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이번 조치는 단순한 기술 실험을 넘어, 전통 금융 자산이 규제 체계 안에서 블록체인으로 이전될 수 있음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토큰화는 일부 핀테크 기업이나 제한적인 파일럿 프로젝트에 머물렀지만, 미국 금융시장의 중추인 DTCC가 직접 나서면서 제도권 금융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SEC 위원 헤스터 피어스는 이번 결정을 파일럿 성격으로 규정하면서도, 전통 자산의 온체인 이동을 향한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규제 당국이 블록체인을 기존 금융 시스템의 대안이 아닌, 인프라 확장의 수단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DTCC, 토큰화 자산의 제도권 허브로
DTCC는 이번 승인으로 토큰화된 주식과 ETF, 미국 국채 등을 블록체인 상에서 보관하고 이를 공식 자산으로 인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토큰화 이후에도 기존 증권과 동일한 법적 권리와 소유 구조는 유지된다.
특히 예탁과 결제, 기록 관리까지 블록체인 기반으로 확장될 예정이라는 점에서 변화의 폭은 크다. 이는 금융시장의 백오피스 기능이 온체인으로 이동하는 첫 사례로, 향후 글로벌 자본시장 운영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장 많이 거래되는 자산부터 온체인으로
토큰화는 실험적 자산이 아닌, 시장에서 가장 유동성이 높은 자산군부터 시작된다. Russell 1000 구성 종목과 주요 지수 추종 ETF, 미국 재무부가 발행하는 T-bills·notes·bonds 등이 우선 대상이다.
이는 기관 투자자와 글로벌 자본이 실제로 사용하는 핵심 자산을 블록체인 위로 옮기겠다는 의미다. 토큰화가 단순한 신기술이 아닌, 실질적인 금융 인프라로 작동하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금융 시장의 ‘시간’이 사라진다
이번 결정의 가장 큰 변화는 거래와 결제 시간의 제약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기존 주식과 채권 시장은 평일 장 시간에 묶여 있었지만, 온체인 토큰화가 확대되면 자산 이동과 결제가 24시간 가능해진다.
전통 금융과 디지털 자산 시장의 경계도 빠르게 허물어질 전망이다. DTCC는 장기적으로 약 100조 달러 규모에 달하는 전체 예탁 자산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이전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금융 인프라의 구조 자체가 재편되는 시나리오다.
토큰화, 실험에서 표준으로
DTCC의 행보는 나스닥을 비롯한 다른 시장 인프라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주요 거래소와 청산 기관들도 토큰화 기반 결제·청산 체계 구축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큰화가 표준으로 자리 잡을 경우, 결제 지연 감소와 담보 효율성 개선, 글로벌 자본 이동의 가속화 등 금융시장 전반의 효율성이 크게 높아질 수 있다. 동시에 규제 정합성과 투자자 보호, 시스템 안정성 확보는 향후 확산의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미국이 여는 온체인 금융의 본게임
이번 SEC의 결정은 블록체인이 금융 실험 단계를 넘어, 글로벌 자본시장의 핵심 인프라로 편입되는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미국 국채와 대형주, ETF 등 가장 보수적인 자산부터 온체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변화의 속도는 예상보다 빠를 수 있다.
금융 시장은 이제 ‘디지털 자산이 전통 금융을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전통 금융이 어떻게 온체인으로 진화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이번 결정은 그 변화가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신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