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DeFi Dave
번역: 블록 유니콘
암호화폐는 내러티브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분명 발전이 있었고, 인프라, 처리량, 확장성이 몇 배나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관점에서 우리는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비트코인과 솔라나(Solana) 밈 코인 외에도, 이 분야는 오랫동안 새로운 참여자를 눈에 띄게 유치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전체 산업, 특히 이더리움 및 관련 분야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전체 번역은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비트코인(Bit)과 이더리움 오늘의 신화 구축 현황
비트코인(Bit)의 단순성은 새로운 신화 구축자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합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세일러가 횃불을 이어받아 비트코인(Bit)을 월가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비트코인(Bit)은 이제 규제된 ETF가 되었고 전통 금융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더리움은 더 복잡하며, 신화 구축이 여러 층위에서 진행됩니다. 이러한 복잡성은 초기 코인공개(ICO), DeFi 여름, NFT 열풍, 분산형 자율 조직(DAO) 부흥 등의 시대에 나타나며, 이 모든 것들은 이더리움 위에 어떤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를 반영하면서도 그 고유의 혈통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이더리움의 신화는 현저하게 약화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투입된 에너지가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정신적 점유율이 L2와 L1의 대체 레이어로 분열되었고, 이는 몇 년 전이라면 직접 이더리움으로 사용자를 끌어들였을 것입니다. L2는 항상 로드맵의 일부였고 계획대로 실행되었지만, 실제로 이는 이더리움의 이전 혈통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오늘날의 L2는 정신적으로 L1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논점은 나중에 논의하겠습니다.
마케팅은 신화 구축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각본을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보다 데이터를 우선시하는 방식입니다.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은 거대한 자금을 모으고, 단기 최적화된 마케팅 캠페인을 벌이며, 토큰 생성 이벤트(TGE)를 시작한 후 생태계가 증발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수록 암호화폐 산업은 자멸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데이터 추구 과정에서 신화 구축은 마케팅에 의해 대체되고, 매력적인 신화는 저렴한 구호로 대체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이기적인 참여자들을 끌어들이는 표면적인 목표입니다. 한때 진전을 나타냈던 지표들은 게임화되어 무관한 것이 되었습니다. 사용자는 동기 부여가 필요한 영혼이 아니라 최적화해야 할 데이터 포인트로 취급됩니다. 이는 사용자 이탈과 환멸로 우리를 이끄는 파우스트적 거래입니다.
마케팅 자체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이는 다른 산업에서 시간이 증명한 효과적인 관행입니다. 문제는 마케팅 담당자들이 암호화 영역에 들어올 때 문화적 배경이나 기본 이야기를 전혀 모른다는 점입니다. 신화 없는 마케팅은 최선의 경우 공허하고, 최악의 경우 약탈적입니다. 암호화폐, 특히 이더리움의 경우 이 정체기를 벗어나려면 순수한 마케팅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결론
신화 구축은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고 그 연결을 유지하는 정신적 기반 시설입니다. 이는 개인에게 목표와 소속감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산업의 많은 영역에서 이는 이미 잊혔고, 대신 냉혹한 지표와 단기 관심을 최적화하는 일시적인 상승이 자리 잡았으며, 이는 장기적인 유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희망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집단적 기억상실에서 깨어나 다시 신화 구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배우고, 모방하고, 조정할 수 있는 수많은 예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미로 진자를 다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단,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나는 수천 명의 신화 구축자들이 함께 이야기를 엮어내는 세계를 보고 싶습니다. 활기찬 공동체의 교향곡을 구성하며, 협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기술을 창조하고 문화를 형성하는 세계 말입니다. 우리는 돌아올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이야기 전달/신화 구축의 부흥은 손에 닿을 듯 가깝습니다. 단, 우리가 고립 속에서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을 멈추고 의미 있는 행동을 함께 취하기 시작한다면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