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위에 새겨진 에이전트의 여권
순식간에 AI 에이전트가 코드를 짜고, 계약서를 검토하고, 주식을 매매하는 세상이 왔다. 그런데 이 에이전트들에게는 신분증이 없다. 누가 만들었는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믿어도 되는지. 확인할 방법이 전무하다. 수십억 명이 가면을 쓴 채 거래하는 무도회장. 이것이 2026년 에이전트 경제의 현주소다. 유능한데 신원불명인 존재들의 세계.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문제다.
이 문제를 푸는 최신 접근 중 하나는 ERC-8004라는 이더리움 표준이다. MetaMask, Ethereum Foundation, Google, Coinbase의 엔지니어들이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비자, 중앙은행, 구글, 여권 발급 기관이 한 테이블에 앉은 격이다. 왜 이들이 모였을까. 각자 따로 만들면 모두 다 지는 게임이라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다. 에이전트 경제에는 어떤 기업도 소유하지 않는 중립적 기술 인프라가 필요하고, 그 조건을 충족하는 건 블록체인 밖에 없다.
ERC-8004는 세 개의 레지스트리로 구성된다. Identity Registry는 에이전트의 출생신고서다. Reputation Registry는 신용등급이다. 단순한 별점이 아니다. Validation Registry는 법원이다. 작업 위험도에 따라 평판 기반, 스테이킹, zkML/TEE 세 단계의 검증을 제공한다.
더 넓게 보면 하나의 타임라인이 보인다. 에이전트의 능력 선언(MCP) → 에이전트의 공용어(A2A) → 에이전트의 화폐(x402) → 에이전트의 시민권(ERC-8004). 인류가 언어를 만들고, 화폐를 만들고, 법을 만든 순서와 같다. 다만 수만 년이 아니라 18개월 만에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장밋빛만은 아니다. 시빌 공격 방어는 미해결이고, 결제 통합은 스펙에서 빠졌고, 개발자 경험은 아직 거칠다. 에이전트 자체도 복잡한 작업에서 여전히 환각을 일으킨다. 걸음마 떼는 아이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도로는 항상 자동차보다 먼저 깔린다. 인프라가 앱보다 먼저 오는 건 기술 역사에서 예외 없이 반복된 패턴이다.
에이전트 사회는 온다. 그 사회에는 출생신고가 필요하고, 신용 시스템이 필요하고, 법원이 필요하다. 지금 이더리움 위에서 그 헌법의 첫 번째 초안이 쓰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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